2016 메모: 교훈의 집적


오은


 지난 시대를 ‘불모’ 라고 판단하는 것에는, 모두가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판단 이후에 실질적 작업 전개, 적용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면, 결국 그리도 극복하려던 지난 시간의 교훈들로 논파당하고 만다.

 작품을 설명할 때, 시대인식을 바탕으로 작품의 형성배경과 분석을 시도하거나, 개인적 경험을 강조하여 출발할 수도 있겠는데(물론 여기서 개인적 경험 은 지난 시대의 그 ‘작은서사’ 와는 다른 것이다. 그냥 거창하지 않다는 뜻에 가깝다) 어느쪽이 나은가 하면, 물론 실제 작업의 과정-구현에 따라 다르겠지만, 글로만 놓고 본다면 후자가 차라리 나아보인다. 개인적 판단들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더 나아서라기 보다는 전자의 서술은 너무 거창한 것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정도 2016년의 시대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시대성이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여기저기서 제 시대의 시대성을 갱신-재규정해보려는 노력이 빗발치지만, 어쩌면 역사이래 처음겪는 큰 변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기인 탓에, 그 노력들은 계속 빗나가고 만다)그런 접근법을 취해왔던 작가들의 사례를 한번 상기해 본다면 또 꼭 시대성 때문 만은 아닌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요셉보이스 같은 작가는 어떠했는가? 조셉 코수드는 어떠했는가? 시대-파악 자체로부터 출발하는, 혹은 최소한 그렇게 언술되는 작품들은 언제나 위험부담이 있다. 이는 ‘작가’ 로서의 시대-파악 이라는 것이 과학적이기보다는 자의적일 수 밖에 없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어쩌면 예술가라는 직능 자체 때문일지도 모른다. 매번 작업은 비과학적이라고, 사실 아무리 잘 조직된 발화를 하고 서술을 해도 근본적으로는 주술적일 수 밖에 없다는, 좋게 말하면 ‘통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짜증나는 일이었는데, 어쩌면 정말 ‘과학적인’ 접근법을 취하고 싶다면 최소한 연구자를 하던지 아니면 미술을 하지 않는 것이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인재는 ‘상’을 다루는 미술에 천착하지 않는다 했던가? 르네상스적 미술-과학-기술-철학의 지식인 모델이 다시금 떠오른다.

 자신을 이전 시점까지 진행된 모든 미술-역사가 끝난 자리에서 출발하는 무엇으로 상정하고, ‘교훈’ 들을 재조직 한다는 것. 그런데 그것이 ‘교훈’ 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판단하나? 역사에 대한 해석에 따라, 어느 부분이 교훈인지가 갈릴 텐데, 작업이 교훈들의 재조직 이라고 언술 한다면, 내가 전거로 삼는 것들이 전부 교훈적인 것이라는 뜻이 된다. 그것은 곧 관점이 되고, 결국 논란이 될 수 있을 텐데,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일까? 근과거의 작가들 또한 유사한 태도를 많이 취했지만, 제 자리-살아야하니까-의 확보를 위해, 그것을 ‘농담’ 정도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결과적으로 판단유예의 시공하에서 정말로 생명을 연장시켜주었다.

 그런데 그러한 방법 역시 지나간 후에 사이비-훈고학적 태도를 취할 때, 엔드폼이 농담에 그치도록 설정한다면, 결국 또다시 ‘과거를 저열하게 반복’하기 십상 이니까, 정말로 ‘훈고학적’ 태도를 취해야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결과물은 무엇이 될까? 정말 신고전주의? 만약 20세기를 DB로 삼는 신고전주의-같은 것이 귀결이라면, 낭만주의는 무엇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