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메모: 순례자
오은
오늘날 과거의 힘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강력해졌다. 실재는 이제 한갓 데이터가 되어 증기처럼 둥둥 떠다니고, 오래된 것들, 이미 죽었어야 마땅한 것들이 주는 충격과 경의는 계속해서 강해지며 오늘을 지배하고 있다. 실제로 겪어보지도 못한 과거가 마치 직접 경험한 것처럼 노스탤지어를 유발하고, 문화/예술에서 20세기적 템플릿은 끝없이 되살아나며 오늘을 옥죄어 온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인식한다 한들, 그 무한한 루프에서 빠져 나갈 방도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매혹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려 해도 결과적으로 지난 시간의 어딘가에 수렴하는 작은 루프를 만들게 될 뿐이고, 반대로 과거를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결과 역시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지 못하는 방언이 되어 산산히 흩어질 뿐이다. 정과 반이 투쟁한 결과 합은 끝없이 지연되는, 과거가 현재를 전유하는 세계. 이 상황에 대한 해답은 정말로 과거의 완전한 망각 밖에 없는 것일까?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과거의 그림자에 어떻게든 대응해 보려는 충동은 근년의 작업의 원동력이 되었다. 위대했던 과거를 딛고 재출발하기 위한 가장 빠른, 오늘의 상황에 부합하는 방법은 어쩌면 과거를 잊혀질 때까지 반복적으로 기리고 순례하는 것은 아닐까? 새로움의 충격이 낡음의 충격으로 대체된 상황, 곳곳에서 유령처럼 출몰하는 과거의 소산들과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치 순례자에 비유되는, 어떤 성찰적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은 자기방어에 불과할까, 아니면 하나의 길일까? 이것은 또 하나의 전유일 뿐일까, 아니면 새로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