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메모: 기꺼이


오은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이제 완전히 기각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받아들여야한다. ‘인간적인’ 것에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자아를 찾아 떠나기, 자존감을 회복하기, 진짜 나를 발견하기, 꿈을 실현하기 같은 테마가 2020년대에도 유효할 줄은 정말 몰랐다. 익히 알려진 대로, 인간은 잘 짜여진 기계일 뿐이다. 대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곧 인간 정신은 대체 될 예정이다. 아직은 유효하지만, 시간문제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잘 안다.

 대체가 완료되었을 때, 인간은 오히려 행복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도 사람들이 매달리는 그 행복 말이다. 그러면 그걸로 된 것이다. 누군가에겐 그 행복한 상태가 죽음에 다름 없을지라도, 다른 누군가는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뭐 싫어도 할 수 없다. 거스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사물의 지위는 어떻게 될까? 실재하는 사물이 특수한 지위를 누리던 시간도 끝나간다. 사실, 이미 거의 끝났다. 그냥 마지막 남은 시간이라 잠시나마 특별해 보일 뿐이다. 실재에 애착을 보이는 우리의 증상이 완전히 없어질 순 없겠지만, 그래도 결국은 적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말은, 그러니까, 최소한 우리가 알던 예술은 완전히 끝장난다는 소리다.

 ‘예술’이라고 불리는 무언가는 계속 이어지겠지만, 그건 더 이상 우리가 기억하는 현대예술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옭아매는 낡은 방식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잃고 말았다. 차용이니 전유니 따지기 전에, 기본적으로 예술은 퍼블릭 도메인이었어야 했다. 베일에 쌓인채 암암리에 전파되는 꿈과 이상을 누군가 주워먹기 기다리는 방식으로는 부족했다는 소리다.

 앞으로의 세상에서 예술이 나름대로 ‘행복’ 할 방법은 없는 걸까? 어쩌면 현대예술의 ‘헤비메탈화’ 라던가, ‘프로그레시브록화’는 어떨까? 외부의 이해를 얻지는 못해도 마을 안에서 만큼은 원칙과 룰을 가지고 전진하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외부의 이해에 대해선 그냥 신경 꺼버리는 것도 좋겠다. 몰이해의 확산을 초래하는 것 보다는 커뮤니티를 제한하는게 낫다는 것이다. 제일 바깥 쪽엔 단단한 보호막을 씌우고, 안쪽에선 카피레프트와 오픈소스의 강력한 원칙 하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무슨 아카데미, 살롱, 신고전주의, 라파엘전파같은 소리를 하냐고? 맞다. 그런데 씬이 고립되는 것이 언제나 해로울까? 예로부터 고립된 씬을 깨부수면서 갱신이 이루어져 왔지 않았냐고? 그건 깨부술 씬이 남았을 때나 가능한 소리고, 이미 다 부서져서 잔해만 남았는데 그 잔해를 또 잘게 쪼개서 뭘 더 얻겠는가.

 예술을 통해 인간을 반추 할 수 있었던 시간이 끝나간다. 정확하게는 앞으로 탄생할 예술들의 운명이 그러할 예정이다. 완전히 평탄해진 예술의 길엔 망각이라는 지옥만이 기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