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메모: 기시감/데자부
오은
'오늘' 더 이상 현재-지금은 없다. 오늘의 지금은 일종의 기시감 덩어리이자 데자부의 총체로 이루어져있다. 변화된 미디어 환경, 주거환경, 포스트-전지구화, 기대 감소의 상황 등등은 오늘의 인간이 오늘을 살 수 없게 한다. 오늘의 인간은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 속의 npc 캐릭터, 아니 사실 그냥 스크린 앞에서 순서에 맞게 버튼을 누르는 그 순간처럼 삶을 살게 되었다.
게임은, 인간의 행동 유형/기억 들을 계량화/ 추상화 / 모듈화 하여 제 규칙으로 삼았다. 체스나 마작부터 지금의 가상현실 게임까지. 그런데 00년 이후, 소위 '인터넷 이후'의 상황에서, 게임은 그자체로 '리얼한' 어떤것이 되었다.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가 진작 분석한 것과 유사하게, 어느 시점 이후의 인간은 말그대로 '게임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게 되었다. 게임을 즐기지 않는 사람은 어떻냐고? 엄밀히 말하면, 문화컨텐츠로서 '게임' 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그래서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티' 라는 말을 사용하기보다, 새로 고안된 용어가 필요하겠지만..
예를 들어보자. 인터넷이 공기처럼 되어버린 어느 시점 이후, 지리학자나 특별한 취미를 가진자가 아닌이상 지도는 더이상 지도가 아니게 되었다. 맛집 검색, 아니 더이상 검색이라고 부를수도 없다. '빅데이터' 대체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것들은 모든 경험들을 레디메이드화한다. 웃긴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상황에서는, '지식인' 같은 것도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것들을 별다른 숙고없이 공기처럼 느끼고 살아온 삶은, 현재를, 바로 지금을 과거와는 어떻게 다르게 느끼게끔 하는가? 문학, 영화, 티비, 어쩌면 초기 인터넷 까지도, 2010년대의 시공과는 본질적으로 다를것이다. 이제 삶은 우리 머리속에서 그야말로 '게임적' 으로 구성되고 돌아가는 무언가가 되었다.
동굴벽화가 처음 어딘가 동굴에 그려졌을 때 부터, 모든 미디어는 인간에게 편의와 더불어 경의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증기기관과 디젤엔진은 윌리엄 모리스와 보치오니를 낳았다. 그런데, 이런 지겨운 순환이 100년째 반복되고 난 뒤의 인간들, 바로 우리들은 지난 시간들로부터 무엇을 보았을까? 가깝게는 90년대, 포스트 휴먼의 논의들이 새로운 과학기술과 그것이 그리는 뉴밀레니엄을 바라보는 방식은 어떠했는가. 00년대의 뉴미디어, 넷-뭐시기들은 어떠했는가?
컴퓨팅인터페이스 기술의 선구자 더글러스 앵갤바트는, 60년대에 이미 훈련이 필요한 것은 컴퓨터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접근이 옳다거나 그런 걸 떠나서, 미디어는 언제나 주어진 무언가였고 인간은 그에 적응하거나 부적응하여 좌충우돌할 따름이었다. 문제는, 산업혁명이래로 대충 그런 좌충우돌의 시간이 100년이 넘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지난 시간의 교훈에 따르자면, 지금의 '게임적' 상황이, 전래가 없든 심대한 위기든 어떻든, 그에 적응하여 거듭나야 한다는 것, 아니 잘 훈련된 오퍼레이터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공허의 미디어, 현재를 살지 못하게하는, 피한다고 피할수도 없는 그것에 대응하여 훌륭한 조작자가 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에 맞춰 최적화된, 그러니까 '내땅' 을 잃지 않으면서 (아니 그건 적이 아니니까 우리는 땅을 잃을 염려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래 등산복 아저씨가 하는 말처럼 그냥 더불어 사는 방법같은 거 말이다. 모자르다면 상부상조? 상생? 뭐든. 그렇게 탄생한 조작자는 아마도 , 마이너리티 리포트같은 '인간성' 은 없겠지만, 최소한 예언자들을 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 무너져 폐허가되버린 성채의 벽돌 하나까지 부숴버리려는 집착자가 되지도 않을 것이고, 다시 성을 쌓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 성을 쌓을 수는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공허에 공허로 대응하는 방법, 그대로 돌려주기, 미러링, 전유. 그런 방법들은 적어도 지금은 명이 다한 것 같다. 이것은 '만남을 찾아서' 같은 걸 추구해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아무튼 지금은 그렇다는 것이고,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보면 우스운게, 지난 시간 어느 때 보다도 가장 현재를 사는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의 인간과 가장 큰 차이점은, 비꼬지 않겠다는 것이 아닐까? (꼬인 마음 없이 돌파하겠다는 그 동세) 이 무슨 세상 모든 농담을 모욕하는 소리같겠지만, 그런건 아니고, 훌률한 농담은 여전히 훌륭한 농담이다. 유효한 전선에서의 전략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게 탄생한 예술품이, 기시감에 사로잡힌 ‘오늘’처럼 기시감으로 그치지 않고, 숙련된 조작자가 만들어낸 훌륭한 공예품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들과, 지난 시간속 그것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마도 미학화된 삶의 결정이라는 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