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메모: 깃드는 것
오은
왜 우리는 이전 시대에서 처럼 작품 자체에 주목해서 말하기가 힘들까? 말을 할 수 조차 없는 건 아니다. 사실 다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별로 새롭지 않다는 걸. 아주 미묘하게 인프라 씬 하게 새롭지만 그건 어떻게 옛날 처럼 말로 구제될 만한 그런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훌륭한건 나오지만 그런건 정말 한두개일 뿐, 아마도 전체 전선이 정체되었기 때문일까? 어떤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모두 소진된 시대, 그래서 다같이 약진한다는 기분 혹은 어떤 고양감을 갖기 어려운 상태 그 때문에 어떤 문화적 상황의 열매로서의 작업들도 통째로 소진되는 상태?
우리가 앞으로 강하게 나아가기엔 지난 시간들 사이에 겹겹히 쌓인 교훈들이 너무나 많다. 인간은 실수를 반복 한다지만, 그건 실수를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 ‘실수’가 반복 될지 말지는 결국 무엇이 실수였는지를 판단하는 방식에서 갈린다.
예를들어 하종현에겐 ‘자연으로의 통로’ 라던가 ‘허물을 벗는 길’ 같은 말들이 적용될수 있다. 그렇다면 유사하게 (필립다장이 하종현과 라이먼을 대조하는 대목을 상기하면) 물질성을 다뤄보고자 하는 나는,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스크린의 감각과 대조되는 하종현의 물성을 강조하지만, 내가 다루는 물성은 결국 스크린의 그것이다. 말하자면 3d 모델링, 맵핑, 렌더링 같은 거다. 이를 통해 탄생한, 어쩌면 "접합"에서 흘러내리고 튀어나오고 다시 밀어진 물감의 지층들과 유사한 그 무엇에 깃들 만한 정신은 대체 어떤 것일까? 어쩌면 ‘깃드는 것’ 자체가 무효화된게 아닐까?
(예를 굳이 들자면 ‘베이퍼 웨이브’의 그것과는 다르게) 나는 어째서 같은 감각? 을 토대로 하면서도 과거의 물질적 감각에 더욱 끌리는 것일까? 스크린의 비물질적인 상황들에는 왜 어떤 종류의 의미부여도 하기 싫은 것일까? 만일 그런 비물질적인 상황들을 미디엄으로 사용할 때에도 그것은 언제나 실제 물질을 다루는 것의 역으로 상정하게 된다.
하종현에게는 ‘물질너머 발생하는 그 어떤 것’ 이 중요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