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메모: 낡은 도판
오은
생각해보면 미술에 대한 동경은 어린 시절 마티스 도록을 들여다보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변하지 않아서, 그것이 퇴행적이거나 말거나 내가 즐거운 순간은 과거의 위대했던 성취에 잦아들 때다. 실제로 살아보진 못했지만, 어떤 ‘발전’을 꿈꾸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내달리던 시대를 ‘추억’하는 것. 그러나 이는 상당한 우울감을 동반한다. 왜 나는 하필 이런 시대를 살고 있을까? 무책임한 감정들이, 마치 참전자들의 ptsd 마냥 올라온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런 우울보다도 과거를 넘어서 보고 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는 그 실현가능성과는 무관하게 오는데, 어떤 열정에 사로잡히는 그 고양감의 순간이 중요하다. 그것은 상당히 중독적이며, 아마도 오늘의 어떤 불능성에 기인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 감각은 ‘가짜’ 디지털 빈티지 필터가 적용되어 떠도는 사진들의 휘발성이 아니라, 오래된 책 냄새가 풍기는 도록과 그 도판의 무거움에서 더 강하게 온다. 그러나 이는 단지 스크린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책의 물질성이나 원본성 때문만은 아니다. 전설적인 도판에서 느껴지는 특별한 애상감은 단순히 오래된 이미지의 앤티크(Antique)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출처와 맥락과 위계를 성찰할 수 있는데서 온다. 이는 일종의 신비감, 경탄이지만, 그 충격은 맥락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잘 알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재와의 충돌이다. 요컨대 이는 과거와 현재의 낙차에서 발생한다. 도판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을때 느껴지는 바로 그런 즐겁지만 우울한 감정, 환기되는 과거의 성취와 열정, 고양감을 통해 한심한 오늘에서 도피해보고자 하는 충동. 이런 상태를 나는 ‘도판 감각’ 이라고 부른다. 이는 이미지로부터 비롯되는 감각인 것은 맞지만, 오늘날 이미지 일반의 조건에 대한 것은 아니다. 특정한 ‘도판’ 을 출발점으로 삼는, 현대미술과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이런 태도는 종교적 순례 행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시공에선 증기처럼 흩날릴 뿐, 과거에 행했던 어떤 기능-권능들을 모두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유산들, 도판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모종의 고양감에 사로잡히는 이상한 경향은 마치 순례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 '순례’의 대상이 된 작품을 실제로 보고, 마주하는 일은 오히려 기피되는 경향이 있다. 많은 경우, 과거의 작품들은 실제로 다시 보기 어렵다. 그것들은 대부분 미술관 수장고의 어둠 속에 있다. 다시 전시 되는 경우라 해도, 그것은 도판으로서 주던 감흥을 주지 못한다. 스크린의 시대에 작품의 힘은 실제로 볼 때 곧잘 감소된다. ‘인증샷’을 찍는 순간, 인증샷이 아니더라도 기록용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찍고 저장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작품의 아우라, 혹은 물신성, 혹은 정신성, 혹은 깃들던 것은 휘발되고 만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도판 감각은 ‘충격’ 으로 부터 온다. 오늘의 미디어 조건에서는 전설적인 작품을 실제로 봐도, 오히려 충격이 감소하고, 때문에 권장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직접적으로 얘기하자면, 이 도판 감각이란 대부분 책에 틀어박혀 있을 때 온다. 반복적인 도판 감각이 이를 ‘순례’ 행위에 비견할 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 지점이 곧 작업의 출발점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개인적 관심의 대상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과거의 옹호나 오마주를 위해서도 아니며, 과거를 재료처럼 다룰 수 있게된 오늘의 상황에 대한 재설정을 시도해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실천 단계로서, 나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지는 법칙을 세웠다. 1) 첫번째 단계는, 미술사적 범본들을 조사 연구하고 이를 '광산'화 하는 과정이다. 이 때, 연구 대상들의 역사적 평가나 맥락 보다는 연도 중심으로, 연대기적인 단순 나열 방법을 사용한다. 2) 두번째 단계는, 첫번째 단계에서 만들어진 광산에서 인용의 대상을 결정하고, 실제 작업 과정을 설계하는 단계이다. 이 때, 무분별한 혼성을 피하기 위해 논리적 기준을 설정한다. 또한 계획만으로 작품의 최종형태를 확실히 예측할 수 없도록, 추상적 작업 단계를 설계한다. 3) 마지막 단계는, 두번째 단계에서 설계된 과정을 실제로 적용, 구현하는 제작 단계이다. 추상적으로 설계된 과정을 실행할 때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들은, 결과물의 물신적 성격을 강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해결하도록 한다. 이렇게 제작된 작품들은 과연 무엇을 증언하게 될까? 최소한 과거를 과거로서 대하고 존중할 때, 오늘이 살아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