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슬러 오늘로 향하는 법 : “기도하는” 조형의 원리 _ 황재민 평론가
황재민
작가 오은과 정재용은 2014년 11월부터 프로젝트 그룹 789의 멤버로 작업을 진행했다. 789는 ‘정신과 시간의 방’(이하 ‘정시방’)이라는 이름으로 2015년 4월 1일부터 총 367일, 약 1년에 달하는 시간에 걸쳐 몇 가지 규칙 아래 작동하는 공간을 기획했는데, ‘정시방’은 당시 서울의 미술-환경에서 새로운 주제로 가시화됐던 ‘신생공간’의 성격과도 겹쳐 보이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렇지만 ‘신생공간’이라 불렸던 몇몇 공간, 혹은 맥락과 같은 것이 제도적 미술의 외부에서 정상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상 환경을 만들어 일종의 바깥을 활성화하고 그를 통해 미술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여러 기술적 장치를 재정의하는 일에 일시적으로 효용을 발휘했다면, ‘정시방’ 활동의 중점은 거기에만 있진 않았다.
789가 사용한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는 이름은 만화 《드래곤 볼》에 등장하는 가상의 공간으로부터 빌린 것인데, 극의 설정에 따르면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의 1년은 바깥에서 하루의 시간에 해당하므로 등장인물은 이 공간을 통해 극의 내부 세계에서 발생한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789의 ‘정시방’은 《드래곤 볼》의 이런 설정을 차용해 비유적 형태의 공간을 임대한 셈인데, “정신과 시간의 방”이 노력을 통해서 승리한다는, 소년 만화의 서사 구조를 이행하는 기능을 했기 때문에 789의 ‘정시방’ 역시 열심히 노력하여 무언가를 얻어내고 성취하고자 하는 연습의 장소로 작동했다. 연습의 장소로서 ‘정시방’은 참여 멤버들이 작업을 전시하는 실험장처럼 쓰였는데, 멤버들이 다루는 매체가 대개 회화 혹은 유사 회화 형태의 오브제로 일관되었기 때문에 공간은 어떤 매체성을 실험하기 위한 장소이기도 했다. 아마 이것이 ‘정시방’이 ‘신생공간’으로 호명되었던 공간들과 차별되는 지점으로, 네 명의 멤버가 2주 간격으로 하나 이상의 신작을 제작해 발표한다는 규칙 아래 전시를 강제 회전시킬 때 공간은 개방된 작업실과 전시 공간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면서, 미술 전시가 작동하는 방식을 특유의 방식으로 재정의했다.
《드래곤 볼》 속 “정신과 시간의 방”의 속성, 시간이 바깥 세계보다 느리게 흐른다는 공간적 특성은 장르의 서사 구조인 ‘노력과 승리’를 가능하도록 하는 중요한 조건이다. 그렇지만 789의 ‘정시방’에서 이런 시공간의 곡예가 가능할 리 없고, 공간은 만화적 논리가 아니라 현실의 논리를 따르므로, ‘정시방’에는 드라마틱한 노력도 드라마틱한 승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낙차를 인지한 채 789가 연습을 지속하기 위한 규칙을 강제할 때, 이는 닫힌 형태의 가상적 시간성을 구현하는 일에 일조하며 공간 차원에서 ‘무시간성’을 구현하는 매개가 되었다. 이 ‘무시간성’ 혹은 그 비슷한 무엇에는 노력과 연습이 곧 긍정적 성취, ‘승리’로 연결될 리 만무하다는 자각이 있고, 그 배경으로는 비유적 층위에서조차 승리를 상상할 수 없는 듯 보이는 오늘에 대한 시공간적 인식이 잠재해 있다.
작가 오은과 정재용이 공유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인식이다. 두 작가는 나름의 방식을 통해 오늘을 파악하는데, 공통되는 이해는 오늘이 존재감을 상실한 무력한 시간대라는 점이다. ‘오늘’은 새로움의 갱신을 통하여 연결/지속되는 시간이 아니라 과거의 침입과 투사를 허용하며 유지되는 일종의 가상이다. 오늘의 새로움과 과거의 위대함 사이에서 애매하게 잔존하는 오늘의 ‘오늘’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가치 중 어느 쪽과도 관계하지 못하는 채 단순히 힘이 없다. ‘정시방’에서 전시된 오은과 정재용의 작품은 전유라 부를 수 있을 방법론을 통해 과거의 작품이 만들어진 방식을 모방하고, 그 결과물로 추상적 형상의 회화, 혹은 회화적 오브제를 도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오늘’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개인으로서, 시간의 영향을 긍정하고 가능한 적응의 방법을 찾으려는 시도인데, 다양한 역사적 시간대로부터 비롯한 방법론이 뒤섞인 이들의 작업은 ‘무시간성’을 임의로 구현하는 ‘정시방’ 공간의 내부 논리와 적절하게 공명하면서 관계가 없는 시간을 섞는 무차별적 전유 행위에 최소한의 타당성을 부여했다.
‘정시방’은 1년의 시간이 다 지나자 연기 없이 활동 종료를 공표하고 문을 닫았다. ‘정시방’의 종료를 곧 유예된 시간이 허용하는 기회와의 절연이라고 한다면, 각 멤버들의 작업과 인식 역시 ‘정시방’을 전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연습이 ‘오늘’이라는 조건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고민한 결과라고 했을 때, ‘정시방’ 이후 바뀌어야만 했던 것은 바로 작업을 지속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오은과 정재용이 2018년 4월부터 5월까지 진행했던 2인전 《boon》에 기록된 것은 이런 목적 아래 변화 혹은 발전을 추구한 결과물로, 《boon》에서 이들의 작업은 연습적 행위와는 조금 다른 목표를 지향하여, 말하자면 연구에 가까운 모양을 가졌다.
두 작가의 이전 작업과 비교해 볼 때, 전시 《boon》에서 눈에 띄는 것으로는 인용 대상의 변화와 그로 인한 외피의 변화가 있다. 두 작가는 ‘정시방’ 시기부터 지리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가까운 과거, 한국의 근현대 추상 미술을 전유 대상으로 사용했지만, 전시에서 이런 과거는 보다 직접적으로 인용되기 시작한다. 그 결과 《boon》은 20세기 한국 미술의 인상과 시각적으로 밀접한 외양을 갖는데, 그에 따라 전시장은 무채색의 기시감이 펼쳐지는 공간이 되었다. ‘정시방’ 시기 진행되었던 두 작가의 전유 행위가 한국의 20세기 미술을 동시대 서구의 추상이나 역사적 추상 등과 같은 차원의 자원으로 설정한 다음 각각의 구간을 여러 갈래로 교차시키며 엮어냈다면, 《boon》에서는 보다 특정한 구역을 설정하려는 의지가 존재하고 그것이 전유 대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시에서 한국의 근현대 추상은 두 작가가 (재)제작한 조형의 갖가지 부분을 넘나들며 인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시를 살피다 보면 어째서 한국의 가까운 과거가 보다 직접적인 주제로 큰 참고가 되는지, 그 사정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처음 떠올리기 좋은, 가장 단순한 이유는 두 작가가 큰 틀에서 ‘한국 미술’의 당사자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과거를 대상물로 정하고 인상 차원에서 모방/참조하며 복제하는 ‘정시방’ 시기의 작업을 확장할 때, 한국의 근현대 미술을 특정하는 것은 ‘랜덤’한 전유의 방법을 벗어나서 조금 더 구체적인 방법론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보다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동시대 한국의 미술가가 한국의 근현대를 인용 대상으로 삼는 일에는 이점이 있는데, 자료에 대한 접근이 비교적 수월하여 전유를 위한 데이터베이스를 형성하는 일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유의 방법론이 부분적 수정을 거칠 때, 그것은 연습장의 논리로부터 탈피하는 방법이 되기도 하고 지난 동시대 추상의 어떤 경향, ‘좀비 형식주의’zombie formalism이라 명명된 문법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나름의 영역을 확보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정시방’에서 진행된 오은과 정재용의 작업에는 역사적이거나 동시대적인 조형을 모방하는 방법을 통해서 ‘좀비 형식주의’ 추상의 문법적 구조를 도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좀비 형식주의’란 예술가 겸 평론가인 왈터 로빈슨Walter Robinson이 2010년대의 추상미술을 분석하며 제시한 단어로, 왈터 로빈슨은 몇몇 젊은 작가들이 제작하는 회화 작업이 서로 비슷한 형태로 양산되는 상황을 지적하면서 해당 회화들을 ‘좀비 형식주의’라 명명했다. 이 단어를 통하여 지칭되었던 미적 현상은 한 동안 화제의 대상이었는데, 2014년 12월 큐레이터 로라 홉트먼Laura Hoptman이 뉴욕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영원한 지금: 무시간적 세계의 동시대 회화The Forever Now: Contemporary Painting in an Atemporal World》를 기획했을 때 그 화제성이 더욱 커져 많은 이야기를 만들었다. 한국의 동시대 회화를 돌아보았을 때 거기엔 ‘좀비 형식주의’라 꼽을 만한 작업이 몇 없었지만, ‘정시방’에서 진행된 오은과 정재용의 연습은 이와 같은 경향에 관심을 가진 듯 보인다. 허나 ‘좀비 형식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혔던 작가들이 미적 경향성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이후 임시적인 명명과 이런 저런 악평을 허용했던 유예의 기간이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을 때 ‘좀비 형식주의’라 불린 어떤 작업의 구조를 파악하는 일은 두 작가에게 더 이상 관심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boon》에서 오은과 정재용은 조형적 모방을 통한 탐구를 지속하지만, 궁금증의 대상은 동시대적 실천이 아니라 가깝되 먼 과거의 작품으로 변한다. 대상이 변하면서 작품이 제작되는 방식과 더불어 그것이 내포하는 가치가 지향점이 되는데, 두 작가에게 있어 공통으로, 과거는 오늘-시점의 개인이 구현하기 어려운 능동적 시야를 동력으로 가졌던 공경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오은과 정재용은 이제 가까운 과거를 탐구하면서 ‘새로움’을 구현할 수 있었던 대단함에 대해 공부하고자 한다. 허나 동시에 과거는 여전히 오늘을 침범하며, 오늘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도록 만드는 주범이다. 그렇다면 과거와 그것이 가지는 대단함을 단순 모방하여 전시하는 것은 오늘의 무력함을 재생산하는 일에 불과하다. 하여 두 작가는 방법으로서 전유가 온전한 형태의 과거를 불러들이는 장치로 귀결되는 것을 피하고자, 조형을 제작하는 방법에 알리바이를 부과한다. 이는 오늘을 침범한 과거를 과거로 대상화하는 일이 되고, 이렇게 과거를 대상화하는 것은 오늘을 지향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된다.
이를테면 오은은 종종 원본을 인상 차원에서 변용한 다음, 그렇게 제작된 조형을 재조립하는 방법을 취한다. 이것은 조형적 탐구를 위하여 과거와 밀착하되 단순 복사에 국한되는 전유를 넘어서는 형태를 만들기 위한 방편인데, 이런 제작법은 전시된 작업 중 "17 #11", "s-16-15" 등의 작업에서 이용된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최소 1가지 이상의 작업을 합체시켜서 언뜻 원본의 외형과 비슷하게 보여도 가까이 뜯어 보면 여러모로 상이한, 기이한 형태의 조각물을 만들어낸다. 조각은 전시 《boon》을 통해 오은이 전개하고자 하는 조형적 방법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18 #2(1-62)"의 경우는 하종현이나 박서보와 같은 ‘단색화’ 화가의 앵포르멜informel 회화가 조각으로 번안된 결과물로, 원본 회화의 마띠에르가 조각의 형태로 복구될 때 그 결과물은 마치 괴생물의 토르소를 조소彫塑한 것처럼 기괴한 형태를 보인다. 작가가 원본을 변용하는 방식은 자연스레 대상을 조형 차원에서 비평하는 일과 관련되는데, 여기에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 비평에는 미묘하게 자조적 정서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오은의 조각은 종종 속이 비어 있고 작업은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노출하는데, 그것은 작품이 원본과는 전혀 다른 재료로 제작되어 조금 더 가볍고 판이한 물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린다. 이는 모방을 통해서 비로소 감각하게 되는 어떤 ‘위대함’과, 그 ‘위대함’을 렌더링 하고자 했을 때 ‘오늘’의 예술가인 자신이 겪게 되는 과부하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전시장의 한구석에는 오은이 제작한 작은 조각이 밀집한 구역이 있는데, 여기에 자리를 잡은 점토와 폴리에스테르 조각들은 위대한 과거와 비교되는, ‘오늘’의 자조적 감각을 응축하여 나타내는 듯 하다. 이 구간에서는 권진규와 이우환, 박석원과 같은 가까운 과거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이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장 뒤뷔페Jean Dubuffet와 같은 역사 속 거장과 교접되는데, 여기서 모방은 보다 직접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러므로 과거는 조금 더 과거 자체로 소환된다. 따라서 누군가는 이 구간을 살피며 과거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저렇게 비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 위치한 "17 #20"은 로댕의 발자크 두상을 인용한 결과물인데, 이 조각의 근처에서는 권진규의 두상 조각이 반복되고 있으므로 어쩌면 이때 권진규와 로댕으로 대표되는, 두 상이한 시간대가 잠시 연결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사실로, 권진규는 무사시노 미술대학 재학 시절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에게서 수학했고, 시미즈 다카시의 스승은 앙투안 부르델Antoine Bourdelle이었으며 앙투안 부르델은 오귀스트 로댕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권진규와 로댕의 접촉은 이 우연한 계보를 상기시키면서 서로 아주 다르게 보이는 시간을 잠시 가깝게 맞닿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이 구석에서, 오은은 아마도 가까운 과거를 통해 더욱 크고 멀게 보이는 위대함을 매개할 수 있는 모종의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18 #5"와 "18 #7"은 권진규의 조각을 본뜬 것으로, "18 #5"가 "지원의 얼굴"을 전유 대상으로 삼았다면 "18 #7"은 권진규의 "검은 고양이"에 피카소의 "고양이"를 텍스처 차원에서 덮어쓰기 한 결과다. "18 #5"는 언뜻 보면 "지원의 얼굴"을 충실히 반복한 결과처럼 보이지만, 그 뒷면은 마치 속을 파낸 사람의 머리처럼 빚어져 있어 인상적이다. 이 이상한 사실주의는 조각의 내부를 비우고 껍데기만 남기는 방식으로 위대함을 재현할 수 없음을 자가 폭로하는 오은의 조형적 방법이 구상 차원에서 드러난 결과이자, 리얼리즘 조각으로의 회귀를 꿈꿨던 조각가 권진규의 이상을 아이러니하게 재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18 #7"의 원본인 "검은 고양이"는 기지개를 펴는 고양이의 모습을 담은 조각인데, 언뜻 사소한 대상을 조형한 것처럼 보여도 "검은 고양이"에서는 조각에 종교적 상징성을 투사하고자 했던 조각가의 정념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오은의 고양이는 허리와 다리가 비쩍 마르고 얼굴은 어쩐지 웃음을 띤 형상이라, 잘 살펴보아도 종교적 형상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처럼 원본을 닮았기에 원본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몇몇 조각에서, 오은은 조형에 정신을 담아 위대한 무엇을 만들어냈던, 그런 일이 가능했던 과거의 미술에 자신의 미술을 가깝게 갖다 대며 자기-비평을 수행한다.
또 이 구석에서 역사적 거장에 대한 매혹과 관심은 종종 흥미로운 방식으로 표출되는데, ‘(ufan)’이라는 부제가 붙은 ‘17’ 시리즈의 몇몇 조각에서 작가는 기자 회견장에서 ‘순간 포착’ 당한 이우환의 얼굴을 조각의 소스로 삼은 뒤 다른 대상과 배합시키며 반복한다. 이것은 생존해있는 역사적 거장에게 존경을 표하는 일처럼 보이기도, 거장을 주제 삼아 농담을 늘어놓는 일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둘 중 어떤 경우든 ‘(ufan)’ 연작은 위대한 조형을 구현한 과거, 작가가 지속적으로 탐구한 원본이 ‘오늘’ 시간을 어떤 모양으로 통과하고 있는지를 고찰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한편 전시된 정재용의 작업은 대부분 벽에 부착된 평면 작업인데, 그 중 유일하게 평면에 속하지 않는 작업으로 "TYPE NO.113"이 있다. 이것은 연작의 일부이자 작업의 제작 방법을 설명하는 조형 차원의 주석인데, ‘TYPE’은 도장 형상의 작은 목판으로, 작가의 말을 빌면 일종의 ‘데이터’이자, 회화를 재-제작할 수 있는 장치 같은 것이다. 회화를 그리지 않고 도장 찍어 만든다는 것은 회화의 제작 방법을 보다 간편한 방법으로 개선한다는 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TYPE’ 연작을 통해 작업을 제작하는 것은 생각보다 수고가 필요한 일이다.
전시된 작품 중에서는 "untitled-18-Ⅳ-001"이 바로 ‘TYPE’ 조각을 활용해 만든 작품으로, 종이 위에 추상적 붓질을 드리운 다음 ‘TYPE’을 그리드 당 두 번씩 찍어 중첩한 결과물이다. 이 중 ‘TYPE’을 이용해서 제작한 그리드는 김환기의 "무제"(1966)을 참조한 것이며, 화면을 장악한 추상은 이응노의 ‘군상’ 연작을 참조한 것인데, ‘TYPE’을 도구로 삼아서 과거의 추상을 전유할 때 그것은 거장의 수공적 특성이 살아있는 조형을 깎아내고 보다 정제되고 둔탁한 형상으로 대체하는 일이 된다. 이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조형의 ‘손맛’, 암묵지 차원에서 매개되는 대단함인데, 이처럼 정재용의 작업에서는 ‘손맛’이 느껴지는 조형적 긴장이 사라지고 평형적으로 표출되는 시각적 균형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boon》에서, 오은이 작업을 통하여 조각의 매체성을 실험한다면 정재용의 경우 조형을 구성하는 방법론에 판화적 기법을 적극 도입한다. 작가에게 판화는 무엇보다도 매개하는 매체로서, 이미지를 복제한다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는 대신 “물리적 중간자”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을 얻게 된다. 정재용은 특정한 과거의 작업을 몇 가지 정한 다음 방법론 차원에서 혼합하여 화면을 제작하는데, 이렇게 선택되는 재료 중에는 종종 작가 자신의 과거 작품이 포함되곤 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판화적 방법이 전유를 위한 물리적 중간자 역할을 도맡는다면 갱신된 판화가로서의 작가 자신은 시간을 매개하는 중간자 역할을 자임한다.
작가 오은과 정재용은 각각 조소과와 판화과에서 수학했는데, 《boon》에서는 이런 분과적 정체성이 뚜렷하게 활용되고 작업의 매체성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한다. 이들이 지난 시기 회화적 형태로 과거를 매개했을 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디테일이나 기법적 차원에 과거를 투사하는 방식으로 매체성을 조작했듯이, 《boon》에서는 동일한 방법론이 조각, 그리고 판화라는 매체를 빌어 연속된다. 이들이 특정한 매체를 기반으로 시간을 매개하고 조작할 때, 가상적 시간이 (오늘로부터) 분할된다. 이 분리된 시공간에서 과거는 보다 이상적인 형태로 미화되는데, 그것이 조형에 담길 때 조형은 심지어 과거로도 환원되지 않으면서, 결과적으로 조금 더 유일해진다.
두 작가는 작업을 통해 ‘오늘’을 임의로 재규정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다룬다. 허나 오늘을 지탱했던 현대성은 자기충족적이고 독립적인 형태의 규범으로부터 비롯한다. 오늘이 이와 같은 자기충족적 규범을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력한 시간이라면, 독립성에 대한 필요를 잠시 외면하고 역사적 사례를 반복하는 것, 전혀 다른 시간의 규범 중 좋은 것을 찾아내어 오늘에 주사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전유는 나쁜 오늘을 극복하려는 방법이 된다.
하지만 극복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니라서, 어쩌면 여기엔 연습하고 연구하는 것 이상의 동력이 필수적이다. 작가 오은은 전시된 몇몇 작품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작업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하는데, “기도하는 마음”이란 과거의 위대함이 태동했던 추상적 원점, 오늘날 절대 재현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무엇을 가늠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그것은 (조형에 투사된) ‘정신’의 대체물로, 확신과 의기양양함이 아니라 불확실함과 절실함을 담아내는 마음이다.
오늘, 새로운 조형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 어쩌면 그를 넘어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조형을 추구하기 위해서, 어떤 작가는 절실한 마음을 갖고 빌어야 한다. 오은과 정재용의 조형에서 관찰되는 자조적인 감정들은 절실한 마음과 불가분으로, 선대의 조형이 갖는 대단함을 재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나타나 정념의 자리를 대신한다. 이것은 한 편으로 불필요할 정도로 부정적인 감정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지만, 사실 이런 감각은 역사적 거장과 ‘오늘’의 작가로서 스스로를 비평적 타임라인 위에 놓고 내려다볼 때 발생하는 감각이다. 말하자면 작업에 반영된 모든 동기는 어제와 오늘의 격차를 표지하고 오늘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한 일에 쓰이는 셈이다. 오늘은 여전히 지루하게 지속되고 꽤 많은 것들이 이 시간 아래 종속되지만, 《boon》을 통해 두 작가가 펼쳐내는 장면은 오늘의 조건을 검토하는 일 이상의 무엇을 시도하는 것이고 어쨌든 이것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