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제적 오브제는 어떻게 조형되는가? _ 임근준 평론가
임근준
….(중략) 홍익대 조소과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친 오은은, 정재용과 유사하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한국의 현대조각과 현대회화 작업들을 참조해가며, 메타-소조 작업을 전개했다. 예컨대, 추상적 토르소 작업으로 뵈는 «18 #2(1-62)»(2018)는, 쉽게 설명하면, 박서보의 원형질 연작을 입체로 번역해낸 결과다. 하지만, 그는 원전에 충실한 조형적 번역을 실시하지는 않았다. 사용한 재료는 철, 시멘트, 에폭시, 폴리우레탄 폼, 레진 등이다.
작가에 따르면, 작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참조 대상의 조형 언어에서 바로 출발한 작업, 둘째, 사조나 담론이나 일화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 셋째, 구체적 참조 대상의 원본성을 무시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든” 작업.
출품작 가운데 제작 시기가 가장 앞서는 «s-16-15»(2016)는 박종배의 «역사의 원»(1965)과 박석원의 «초토»(1967-68)를 변신 합체시킨 것 같은 작업으로, 도판만을 참고했으므로, 앞면의 정보만으로 상상해낸 바의 매시업인 셈이다. 철조를 소조로 옮겼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처음엔 회색 프라이머로 제작했지만, 나중에 석사 청구전에 출품하며 유화로 채색했다고 한다. 사용한 재료는, 레진, 아크릴, 폴리우레탄 폼, 실리콘 등이다.
반면, «17 #4(ufan)»(2017)과 «17 #5(ufan)»(2018)은, 기자들 앞에서 절규하는 이우환의 사진을 바탕으로 작가의 두상을 제작한 작업이다. «17 #4(ufan)»의 기본 조형 언어는 박석원의 «U 교수상»(1961)과 권진규의 «남자 흉상»(1970년대)을 혼합 참조한 것이니, 실존성을 탐구하는 조각의 언어로 이우환의 실존적 위기를 포착해낸 셈이랄까.
«17 #21(ufan)»도 역시 기자회견에 나선 이우환을 모델로 삼았는데, 이 경우 기본 조형 언어는 윌럼 드 쿠닝의 회화적 조각 작업 «라지 토르소(Large Torso)»(1974)를 바탕으로 했다.
보다 간명한 오마주의 작업도 있다. «18 #8»(2018)은, 이응노의 1960년대 목조 «토템» 연작을 참조해 제작한 유사동형의 조각인데, 구현 방법이 더 흥미롭다. 아이소핑크로 기본 형태를 잡고 그 위에 레진을 입힌 뒤, 조각도로 깎아낸 다음, 아이소핑크가 부분적으로 드러나면, 열풍기로 가열해 수지를 녹여버림으로써, 내부의 기본 구조가 고스란히 노출되도록 꾸몄다. (작가는 “조각도彫刻徒의 조각도彫刻刀”라는 말장난을 던졌다.)
반면, «18 #6»(2018)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든” 작업인데, 이를테면, 박서보의 앵포르멜 회화 «원형질 NO.3_62»(1962) 등에 김종영의 추상 철조 «전설»(1958)을 곱해, 뇌내망상 혹은 즉흥 과정을 통해 구성-도출해낸 결과다. 재료는, 철, 시멘트, 에폭시, 레진 등이다.
정재용과 오은은, 20세기 한국현대미술의 역사 등을 데이터베이스 삼아, 참조 대상과 본인들의 거리를 표지해내는 방식으로 새로운 조형의 게임을 시작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판화가의 행위와 조각가의 행위를 재창안해 판화가의 판화와 조각가의 조각을 재규정해내는 동시에, 새로운 렌더링-출력 기술로는 제작할 수 없는, 즉 오늘의 기술 문화 환경에서 허상으로 전락하지 않는 문제적 오브제를 만들고자 애쓰고 있다.
«요리스라만랩: 그래디언츠»전을 신기한 기술로 제작해낸 수집용 가구전이나, «분: 오은 정재용 이인전»전을 자기 색채가 부족한 신인 작가들의 차용 창작전 쯤으로 오독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은 개탄스럽다. 요리스 라만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붕괴 이후 방법론적 파산 상태를 맞은 디자인 세계에서, 미래로 직진하는 기술 진화의 추동을 부활시킨 기적의 주인공이다. “예술과 기술과 과학의 통합”이라는 좌절된 꿈을, 처음으로 실재계에 구현해내는 중이기도 하다. 반면, “과거 세대의 보물을 찾아 되돌아오는” 신화적 서사를 제시한 오은과 정재용은,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보물을 두 팔로 안고 이제 막 오늘로 귀환했다. 다음 단계에서 그들은 보물을 자산 삼아,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개하며 미래로 전진하게 되리라. 미래가 되는 동적 시공을 창출하고야 말겠다는 망상은, 인류를 파국 없는 진보로 이끌 수 있을까? (끝)